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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전철에서

 

 

 

 

<전철에서>

 

 

 

 

 

 

느 봄날 오후, 전철이 멈추고 한 여자가 탔다. 그녀는 복고풍의 품이 넉넉하고 색 바랜 청재킷을 입었다. 열어젖힌 재킷 안으로 베이지색 티셔츠가 보였다. 검정 바지에 갈색 워커를 신었고 등산용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만한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가방엔 산자락이 줄지은 남미의 어떤 지역 이름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왼손엔 책을 편 채로, 오른손엔 펜을 들고 그녀가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멈춰 섰다. 여자는 고개를 숙여 들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철에 있던 많은 여자들과 다르게 그녀의 얼굴에는 화장기가 전혀 없다. 로션 하나 바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동그랗고 얇은 금테 안경을 꼈는데 그 뒤에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눈썹 끝은 흐드러져 퍼지고 경계가 희미했다. 거뭇거뭇 주근깨와 잡티가 보인다. 까만 긴 생머리는 윤기 없이 푸석하다. 왼쪽 소매 사이로 손목에 찬 검정 고무줄이 보인다.

 

람들이 전철에서 내린다. 여자는 뒤쪽에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무릎 위에 가방을 올렸다. 그 위에 들고 있던 책을 받쳤다. 그녀가 손목에 차고 있던 고무줄로 푸석한 긴 머리를 묶는다. 손목에 차고 있던 고무줄이 자연스럽게 머리다발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녀가 가방 위에 올려놓은 책과 펜을 든다.

 

녀는 왼손 엄지와 검지로 책 왼쪽 위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다. 책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엄지와 검지로 슥슥 문지른다. 책을 읽을 때 그녀는 눈썹에 힘이 들어간다. 힘이 들어간 눈썹은 조금 전과 달리 사뭇 뚜렷하게 보인다. 갑자기 오른 손에 들고 있던 펜으로 책 여백에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녀가 책과 대화하는 방법일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해본다. 책은 그녀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그녀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것은 내 호기심을 자극한다.

 

런 상상을 해본다. 그녀는 전철을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으면서 자기 안의 세상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그래서 여자는 오늘 배낭과 워커를 신었을지 모른다. 여행을 하는데 화장은 굳이 필요 없었다. 그녀는 언제, 어디서든 아직 가보지 못한 자신의 세계를 탐험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녀는 인상 깊은 것을 꼭 기록해야만 할 것이다. 긴 머리가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녀는 항상 손목에 고무줄을 차고 있다.

 

녀는 그렇게 한참 책을 읽었다. 여전히 왼손으로 종이를 더듬거리며 펜으로 책의 여백을 채워나간다. 노선이 바뀌어 전철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창에 봄 햇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여자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읽고 있던 책과 펜을 가방위에 올려놓고 두 팔을 앞으로 뻗어 기지개를 편다. 그녀 등으로 햇볕이 내려 부서졌다. 그녀의 눈은 검고 맑았다. 긴 머릿결에 윤기가 드리운다. 그녀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봄날 오후, 햇볕이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