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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전철에서 어느 봄날 오후, 전철이 멈추고 한 여자가 탔다. 그녀는 복고풍의 품이 넉넉하고 색 바랜 청재킷을 입었다. 열어젖힌 재킷 안으로 베이지색 티셔츠가 보였다. 검정 바지에 갈색 워커를 신었고 등산용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만한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가방엔 산자락이 줄지은 남미의 어떤 지역 이름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왼손엔 책을 편 채로, 오른손엔 펜을 들고 그녀가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멈춰 섰다. 여자는 고개를 숙여 들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전철에 있던 많은 여자들과 다르게 그녀의 얼굴에는 화장기가 전혀 없다. 로션 하나 바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동그랗고 얇은 금테 안경을 꼈는데 그 뒤에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눈썹 끝은 흐드러져 퍼지고 경계가 희미했다. 거뭇거뭇 주근깨와.. 더보기
춤 무용수는 점점 춤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다. 빨간색 무당모자에 달린 파란 깃털은 하늘로 뻗어 하염없이 흔들린다. 그녀가 빙빙 돌자 하얀 저고리와 새빨간 조끼, 푸른 치마가 물결처럼 나부꼈다. 그 모습이 마치 예쁜 팽이 하나가 힘차게 도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가 한 마리 새처럼 팔을 쭉 뻗어 팔놀림을 하자 손목에 차여 있던 방울들이 쟁강쟁강 소리를 낸다. 음악은 네 번째 부분인 늦은 엇모리장단으로 바뀌어 숨을 돌리라는 듯 무용수에게 잠시 여유를 준다. 춤이 절정에 다다를수록 그녀는 동작에 몰두했다. 팔과 손을 흔들며 달리고 활개치는 역동적인 동작을 연이어 하면서도 표정은 온화하고 평화로웠다. 마치 꿈을 꾸는 듯 그녀는 춤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녀가 오랜 세월 춤과 함께한 경험과 연습의 무게.. 더보기
소문의 시대 : 소문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 소문의 시대 소문[rumour, 所聞] : 진실성 여부에 관계없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사실이나 정보 남편 ‘너’의 이야기. 너는 대기업 마케팅부서의 과장이며 초등학생 아들과 사랑스러운 아내의 남편이다. 너는 오늘도 어김없이 안개인지 먼지인지 알 수 없는 회색 새벽 풍경에 몸을 던져 출근한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먼저 출근한 C대리가 말을 건다. “과장님 얘기 들으셨어요? 구글에서 만든 알파고라는 인조지능이랑 이세돌 9단이랑 대국을 한대요.” “이세돌이 누군데? 나는 바둑 잘 모르는데...” “과장님. 지금 사람들이 세기의 대결이라고 난리예요.” “그래?” 점심시간이 되자 너와 동료들은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점심은 회사 근처에 새로 생긴 소문난 순대국밥이다. 가게 안은 소문을 듣고 찾아온 직.. 더보기
AI,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AI,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프롤로그 AI(Artifical Intelligence)의 능력은 어디까지일까.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이후 정부와 언론은 AI산업을 강조하고 있다. 아래 그림은 딥러닝(Deep Learning)기술로 구글의 AI가 반 고흐의 그림 스타일을 학습한 후 그린 그림이다. 딥러닝은 컴퓨터가 마치 의식을 가지고 있어 생각하고 배울 수 있는 기술을 의미한다. 즉 단순히 시키는 것만 처리하는 수준을 넘어선 단계다. 이 그림뿐만 아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AI가 글짓기도 하고 있다는 기사도 있었고 다른 분야에서도 화끈한 실력을 뽐내는 AI소식을 들을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 재밌고 흥미롭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덜컥 무서운 마음도 든다. 과연 인공지능은 어디까지 진화하고 우리는 무엇을.. 더보기
트루먼(Truman)이 보내는 편지. 프라이버시의 의미에 대해서... 영화 [트루먼쇼] To. 세상의 모든 트루먼들 안녕. 친구들. 트루먼이야. 아주 오랜만이야. 영화가 개봉했던 게 1998년이었으니 거의 20년이란 세월이 흘렀군. 어린 친구들은 내가 누군지 잘 모를 수도 있겠지. 혹 나이가 조금(?) 있는 친구들도 나를 잘 모른다면 영화를 봐주길 바라. 영화 마지막에 스튜디오를 떠났었잖아. 그 후 쿠바(Cuba)의 수도 아바나(Havana)의 동쪽 코히마르(Cojimar)에서 쭉 살고 있어. 헤밍웨이의 소설의 배경이기도 하지. 내가 헤밍웨이의 열렬한 팬이거든. 어부가 되었는데 일은 힘들지만 꽤 즐거워. 여기 바다가 끝내주거든. 회 좋아하는 친구 있으면 언제든지 놀러와. 실컷 대접해줄게. 참, 여긴 초고추장이 없어. 챙겨오는거 잊지 말고. 내 사생활이 미디어를 통해 공개된걸 알았을 때 나의.. 더보기